나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유희왕 0세대이다.



유희왕 만화책이 갓 정발되고 있던 시절에 도서대여점에서 빌려 본 유희왕 4권이 나와 유희왕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만 해도 유희왕 만화책을 보는 사람은 학교에서 나 밖에 없을 정도로 비주류였기에
유희왕이란 콘텐츠가 지금처럼 성장한 것을 생각하면 감개무량하다.

- 지금도 소장중인 유희왕 만화책 전권
여튼 만화에서 본격적으로 듀얼리스트 킹덤이 나오고, 20권을 넘어가면서 익스퍼트 룰이 재정되면서 내 친구들도 유희왕이란
만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는 유희왕을 보면서
아 이런 카드게임 직접 하고 싶다.
라는 열망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이전에 최초의 TCG 매직 더 게더링이 국내에 갓 상륙했을 때 적지 않은 돈을 써서 매직 더 게더링을 모았지만
당시에는 플레이 환경이 열악했다.
심지어 학교에 들고갔다가 쉬는 시간에 지나가던 교사에게 몇십만원 어치의 카드를 빼앗긴 뒤로는 매직 더 게더링과의 인연은 끊어졌다.
그러한 아쉬움이 있기에 매직 더 게더링을 모티브로 만든 유희왕 속의 카드 게임 매직 앤 위자드가 그렇게 재밌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지금보다는 부족한 인터넷 환경을 통해 유희왕 카드 게임이 일본에서는 발매되어 있고,
일부 상인들이 국내에 들여와 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소식을 접하자 마자 국전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유희왕 카드팩의 실물을 봤을때의 감동은 내 평생에 손에 꼽을 만큼 거대했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일본판 1팩에 3500~7000원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가져간 돈을 탈탈 털어서 푸른 눈의 백룡 전설 팩과 강철의 습격자 팩을 섞어 구매하고,
스트럭처 팩도 하나씩 샀었다.
내가 처음으로 뽑은 울트라 레어카드는 리볼버 드래곤이었다.
당시에는 프로텍터의 개념을 알지 못했기에 친구들과 열심히 카드게임을 했고, 그 대가로 울트라 레어 리볼버 드래곤은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중요치 않았다.
꿈이 현실이 된 지금이 너무 행복했으니까.
물론 당시의 플레이는 엉망진창이었다.
일단 카드가 고등학생들 기준으로도 초 고가였기에 차마 친구들에게 구매를 권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산 카드들로 여러개의 덱을 만들고, 친구들과 덱을 바꿔가며 플레이를 했다.
신기한 점은 나는 일본어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럼에도 유희왕 카드에 적힌 효과만큼은 완벽하게 읽을 수 있었다.
마치 상형문자를 보듯이 글자 모양과 내용을 외워버린게 아닐까.
당시에 쓰던 덱들을 떠올려보면 DNA콤보 덱, 디펜스 덱, 마그넷 워리어 덱, 사이코 쇼커 덱 등이 있었다.
실제 OCG의 효율성 같은 것과는 안드로메다 성운 수준으로 거리가 먼 잡덱들이었지만,
재미있었다.
룰도 지금와서 복기해보면 엉망이었다.
지속효과 함정은 매턴 효과를 발동한다고 생각해서 DNA 개조수술의 대상 몬스터를 매턴 바꿔서
상대 턴일때는 곤충족으로 만들어 벌레쫓는 바리어로 막아내고,
내 턴에는 용족으로 바꾼 다음 버스터 블레이더를 소환해 마무리를 짓는,
지금와서 보면 웃음 밖에 안나오는 전개였다.
그럼에도 재밌었다.
그렇게 행복한 고등학교 생활을 보내고, 수능을 준비하면서 자연히 유희왕 카드게암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 마침내 유희왕이 국내에 상륙했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엄청난 폭풍이 된 유희왕 카드게임에 맞춰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몇백장의 일판 카드들을 한창 유희왕을 즐기고 있던 사촌 동생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그 시키는 그 카드들을 자기가 쓴 게 아니고 자기 친구들한테 팔아서 몇십만원을 벌었댄다.
...
써글 녀석.
더 재밌는 점은 당시 줬던 카드들 중 일부 카드가 지금에 와서는 코인 저리가라할 가격 상승률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럼 뭐해, 내가 알지도 못하는 꼬꼬마의 어머니에게 쓰레기통으로 버려졌겠지.
이후에 유희왕 카드게임을 담은 GBA게임을 조금 즐겼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유희왕은 아이들의 전유물이 되어 있었기에 스스로가 성인이라고 착각한 나는 예전처럼 유희왕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사실 이때 유희왕에 감동하지 못한 것은 세계 대회 수상 레시피들의 로망따윈 볼 수 없는 전개력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까진 로망이 있었기에 애니메이션처럼 하나의 테마로 구축된 덱이 아닌, 철저하게 계산된 승률의 범용 덱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세월이 흘러
유희왕 듀얼 링크스가 출시되었다.
엄청난 과금 유도 때문에 제대로 접해보진 못했지만,
스킬 시스템을 통해 로망 덱이 플레이 되는 모습들은 잊어졌던 감수성을 자극했다.
그렇게 갑자기 다가온 올해 1월 19일
갑작스럽게 출시된 유희왕 마스터 듀얼은 내게 잊혔던 감동과 추억을 일깨워 주었다.
처음엔 살짝 찍어먹어본 듀얼 링크스의 기억과, 옛 추억을 떠올리며 백룡 덱을 맞췄다.
그리고 OCG의 룰이 제대로 적용된 마스터 듀얼은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아니었다.
사전 공부와 체계적인 준비 없이 만든 백룡 덱은 뭐하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나마 카오스 MAX 드래곤으로 골드까진 어떻게 갔지만,
그 다음부턴 답이 없었다.
그래서 영혼을 팔았다.
내 평소 지론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초보자에게 추천하는 엘드리치 덱을 만들었다.
섬도희가 재밌나, 드래곤 메이드가 재밌나, 하면서 이것저것 막 뽑았단 카드들을 모조리 갈아버리고
철저하게 레시피대로 만든 엘드리치 덱은
왜 사람들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지 이해가 될 정도로 쉽고 강력했다.
그렇게 첫 시즌을 플레티넘4로 마무리했다.
액시즈 패스티벌이 열리자 엘드리치 덱으론 딱히 뭘 할 수가 없기에 남들처럼 자폭 덱을 만들어
빠르게 보상만 챙겼다.
챙긴 보상과 그동안 모은 재화로 열차 덱을 만들까 고민하던 중
어떤 능력자가 마스터 듀얼 덱 성향 테스트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슬슬 엘드리치 외에 다른 덱을 해보고 싶었기에
덱 성향 테스트를 했고, 그 결과.

트라이브리게이드가 나왔다.
메타 덱과 로망 덱.
한번 판 영혼은 저렴하다.
그동안 모은 보석을 전부 쏟아부어 톱티어 덱인 십이수 트라이브리게이드 덱을 만들었다.

심지어 트라이브리게이드의 에이스 몬스터 슈라이그가 로얄 등급으로 나오는 대박이 터졌다.
트라이브리게이드는 정녕 나의 운명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날.
난 6연패를 하며 플4에서 플5로 강등되었다.
충격이었다.
최고의 무기이면 뭐하나.
그걸 들고 있는 게 세상 물정 모르는 호호 아저씨인 것을.
그날 밤 이불킥과 함께 선잠을 자고, 다음날 공부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어언 일주일의 시간이 흘러.
드디어 플래티넘 1에 도착했다.
이제야 도착한 이유는 일퀘만 딱 하고 빠지는 내 플레이타임이 문제였을 뿐,
톱 티어에는 이유가 있을 정도로 고승률로 안착했다.
이제는 게임 하나에 미친 듯이 빠지기 힘든 나이이기에
앞으로 얼마나 더 마스터 듀얼을 즐길수 있을진 모르겠다.
하지만 남들이 유희왕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부터 팬이었던 사람에게
이번 유희왕 마스터 듀얼은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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